[박정호의 문화난장] 세상을 바꾸는 그림 한 점

약 10년 전쯤 일이다. 황의록 아주대 경영대 교수는 강원도 태백에서 올라온 여학생을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황 교수는 당시 미래형 인재 육성을 내걸고 방학이 되면 학생들과 함께 외국 문화·기업현장 배낭여행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경비는 사비와 외부 후원으로 해결했다. ‘세계를 보자, 미래를 읽자’고 학생들을 독려했다.

경영학 교수의 인생 2막 초등생에 그림 기증운동 작가·후원자·소비자 연결 화가협동조합 5돌 맞아

황 교수가 그때 지원한 태백 소녀에게 물었다. “네 꿈은 뭐니?” 대답은 뜻밖이었다. “꿈이라고요? 탄광 광부와 시장 할머니밖에 본 적이 없는데, 무슨 꿈을 키울 수 있었겠어요.” 황 교수는 한방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라면서 본 게 적었으니 꿈도 작아질 수밖에요.” 황 교수는 이제 교수가 아니다. 2013년 정년 퇴임을 했다. 정든 캠퍼스를 떠나 지금은 알록달록 캔버스와 함께하고 있다. 그렇다고 전업화가로 나선 건 아니다. 2015년부터 형편이 어려운 작가들을 돕는 한국화가협동조합 이사장을 맡고 있다. 그는 지난 7일 강원도 교육청에서 태백 소녀를 다시 떠올렸다. 강원도 각 초등학교에 중견 화가들의 작품을 기증하는 협약식을 맺는 자리에서다. “산골 어린이들이 그림을 보며 맘껏 상상력을 키웠으면 해요. 당장 표시는 나지 않겠지만 두고두고 삶의 에너지가 되지 않을까요. 예술만큼 좋은 교실도 없습니다.”

황미정 작가의 ‘분첩 여정-이탈리아’. 2년 전 이탈리아 기행에서 영감을 얻었다. 올해 강원도 비무장지대 인근 초등학교에 기증될 예정이다. [사진 한국화가협동조합]

‘어린이에게 그림을’ 프로젝트는 장기 사업이다. 우선 문화 소외지대인 강원도 지역이 선정됐다. 올해에는 비무장지대(DMZ) 주변 초등학교 10곳, 내년에는 탄광 인근 10곳, 내후년에는 중소도시 10곳이 대상이다. 향후 3년간 그림 690여 점(9억원 상당)이 30개 학교로 전달된다. 이후 다른 시도로 사업 지역이 확대된다. “단순히 그림만 보내지 않습니다. 화가들이 학생들을 직접 지도하고, 공동 전시도 열 계획입니다. 예술은 결국 소통이니까요. 이달 중 개별 학교의 신청을 받고, 다음 달 중순부터 작품 진열이 시작됩니다. 11월에는 국립춘천박물관에서 2주 동안 특별전도 열리고요.” 그림들에도 각별한 사연이 있다. 화가협동조합 소속 작가들이 해외 스케치를 다녀와서 완성한 작품 가운데 일반에 판매되지 않은 그림 중심으로 선별한다. 황 이사장은 2년 전부터 매년 작가 10여 명의 해외 답사를 전액 지원해왔다. 화가들은 여행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을 팔아 조합 운영을 보조하고, 조합은 마케팅·전시·판매 일체를 책임진다. 조합은 후원자로만 구성된다. 출범 5주년을 맞아 입소문이 나면서 화가들의 신청이 크게 늘었지만 전문가 블라인드 심사, 작업실 현장 심사, 그룹 초대전 공개 심사 등 3단계 심사를 거쳐야 한다. 최종 합격률은 2% 미만이다. 바늘구멍을 통과한 화가들은 조합이 운영하는 갤러리 쿱(서울 서초동)에서 전시할 수 있다.

“조합은 여유 있는 기업·개인들의 후원으로 운영됩니다. 작가들은 창작에 전념하라는 뜻에서죠.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작가들의 책임의식도 중요합니다. 그림과 작가, 작가와 어린이, 어린이와 지역문화, 이런 3각 공조 체제가 탄생한 배경입니다.”

화가협동조합은 이른바 3무(無) 시스템으로 운영된다. 이사장 급여 전무, 조합원 배당 전무, 그리고 1년 365일 갤러리 휴관 전무다. 기업 마케팅을 전공하고, 국내 여러 대기업을 자문해온 황 이사장의 노하우와 안정적인 작업 환경을 원하는 작가들의 요구가 맞아떨어졌다. 외국에서도 전례가 거의 없는 작가와 후원자의 만남이다. 현재 소속작가는

황의록 한국화가협동조합 이사장 40명, 후원자는 55명(곳)에 이른다.

황 이사장은 교수 시절 취미로 사진을 공부했다. 심미안을 키우려 화랑을 자주 찾게 됐고, 자연스럽게 화가들과 어울리게 됐다. 전시회 뒤풀이 밥값도 댈 수 없는 화가들의 절박한 사정을 알게 됐고, 은퇴 이후의 ‘세컨드 라이프’로 화가 돕기에 뛰어들었다. 그의 모토는 ‘그림 한 점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다. 자신을 마음부자·이상주의자로 소개했다. “처음엔 모두 ‘미친 짓’이라며 말렸지만 저는 가능성을 봤습니다. 그림을 사고 싶어도 작품을 믿을 수 없어 나서지 못하는 사람도 많거든요. 예술이나 기업이나 바탕은 비슷합니다. 신뢰를 먹고 자라죠. 미술 생산자와 소비자를 잇는 다리가 되고자 했습니다. 경영학 공부와 예술 현장의 접목, 제게도 큰 축복입니다. 인생 2막이 즐거울 수밖에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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